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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고 사망자 증가: 죽음마저 고립되는 사회

건강톡톡인포 2025. 7. 14. 13:24

무연고 사망자 증가: 죽음마저 고립되는 사회
무연고 사망자 증가: 죽음마저 고립되는 사회

1. 홀로 죽는 사람들, 숫자에 담기지 않는 현실

2024년 기준, 국내 무연고 사망자는 약 4,000명을 넘겼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두 배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하지만 이 숫자보다 더 중요한 건, 그들이 어떤 삶을 살다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가다.

대부분은 고령자다.
자녀와의 관계가 단절되었거나, 아예 자녀가 없는 경우도 많다.
배우자가 먼저 떠난 뒤, 혼자 남아 노후를 보내는 이들.
조용히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다,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떠난다.
심지어 발견조차 며칠이 지나서야 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젊은 층 무연고 사망도 증가하고 있다.
청년 고독사, 자살, 사회적 관계 단절이 원인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점점 약해지고, ‘이웃’이라는 말도 사라져버린 지금, 우리는 점점 더 죽음의 외로움마저 당연시하는 사회로 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들이 떠난 뒤 남는 건, 몇 장의 서류와 소지품 몇 개뿐.
장례를 치를 사람이 없으면 시신은 화장되어 무연고자 전용 봉안당에 안치된다.
누가 와서 묘비에 꽃을 놓거나, 기일을 챙기지도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조용히 사라진다.

 


2. 왜 이런 죽음이 늘어나는가: 고립을 만드는 구조들

무연고 사망자의 증가는 단지 개인의 불운이나 외로움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면에는 분명히 사회적 원인과 구조적인 배경이 있다.

가족 구조의 변화

예전엔 대가족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1인 가구가 대세다.
부부 중심의 핵가족에서조차 자녀가 없는 가정이 많아지고 있고, 고령자가 자녀와 떨어져 사는 경우도 많다.
부양에 대한 책임감보다 개인의 삶이 중시되면서, 혈연이라는 울타리는 점점 더 흐려지고 있다.

공동체의 붕괴

예전에는 이웃이 곧 가족처럼 기능했다.
동네 어귀에서 인사를 주고받고, 집 앞 반찬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안부를 챙겼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옆집에 사는지도 모른다’는 말이 흔하다.
특히 도시의 원룸, 고시원, 임대주택 등에서는 철저히 단절된 일상이 이어진다.

복지의 사각지대

정부와 지자체가 돌봄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사각지대는 많다.
특히 신체적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정신적으로 고립된 노인들은 시스템에서 빠지기 쉽다.
또, ‘도움을 요청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그저 조용히 살아가다,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이렇게 여러 구조들이 맞물리면서, 우리는 지금 사람이 태어나는 것보다, 죽어가는 방식이 더 외롭게 변해가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3. 남겨진 사회의 책임: 무연고 죽음을 줄이기 위해

무연고 사망자의 증가를 단순히 ‘사회 현상’ 정도로 바라보면 안 된다.
이건 분명히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공공의 과제다.
누군가의 마지막이 고독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자 공동체의 도리다.

이웃 돌봄의 시스템화

최근 몇몇 지자체에서는 ‘고독사 예방 전담 인력’이나 ‘이웃지기 제도’를 운영 중이다.
특정 구역에 1인 가구가 많을 경우, 주기적으로 안부를 확인하고 이상 징후가 보이면 빠르게 대응하는 식이다.
이런 움직임은 늘어야 한다.
돌봄은 거창한 의료나 복지가 아닌, 작은 안부 인사에서 시작될 수 있다.

장례 문화에 대한 재정비

무연고 사망자는 법적으로 처리될 뿐, 인간적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이제는 지자체나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어, 최소한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공공장례 시스템을 고민해야 한다.
실제로 서울, 인천, 광주 등 몇몇 지역에서는 무연고 사망자에 대한 공영 장례를 시행하고 있으며, 자원봉사자들이 유골을 위한 위령제를 열기도 한다.
이러한 시도는 죽음 이후에도 한 인간을 존중하는 방식이다.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다

사회만 탓할 수는 없다.
‘나는 괜찮겠지’라는 생각 대신, 미리 관계망을 만들고 유지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이웃에게 먼저 인사하고, 가족이나 친구와 연락을 이어가는 것.
그 사소한 노력들이 인생의 마지막을 결정짓는 힘이 될 수도 있다.

또한, 고립된 이웃을 발견했을 때 ‘괜히 귀찮아질까 봐’ 모른 척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중요하다.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이고, 그 요청을 듣고 움직이는 사람 역시 우리 자신이다.


마무리하며: 죽음이 말해주는 사회의 온도

누군가의 죽음이 외로웠다는 건, 그 삶 또한 외로웠다는 의미다.
무연고 사망자는 단지 통계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관계로부터 멀어졌는지, 고립을 얼마나 방치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거울 같은 존재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음을 맞는다.
그 순간을 누군가 기억해주고, 함께 있어주는 사회라면 조금 덜 두렵지 않을까.

‘고독한 죽음’이라는 말이 더 이상 익숙하지 않기를.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이라도 주변을 한 번 더 돌아볼 수 있기를.
무연고 죽음이 줄어드는 사회는, 결국 사람이 사람을 챙기는 사회다.

그게 인간다운 삶의 마지막 예의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