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랫동안 ‘일’은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였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는 이유,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묻는 문화, 그리고 사회적 지위와 자아 정체성 모두가 노동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당연했던 전제가 급속도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 인공지능과 자동화, 플랫폼 경제의 부상은 기존의 노동 시장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습니다.
더는 '평생직장'도, '정규직 안정성'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나아가 어떤 이들은 “앞으로는 대부분의 사람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노동이 사라지는 시대, 우리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이번 글에서는 그 질문을 함께 따라가 보며, 노동의 새로운 의미와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합니다.
1. 노동의 역사적 의미: 생존에서 정체성까지
노동은 인간 삶의 기본이었습니다. 초기 인류에게 노동은 생존의 수단이었고, 산업혁명 이후에는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계층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20세기 들어 노동은 단순한 생계 수단을 넘어, 자아 실현과 공동체 소속감의 근거로까지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노동은 양면성을 드러냈습니다.
- 한편으로 노동은 자립과 창조의 과정이며, 자아를 실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 다른 한편으로 노동은 피로, 스트레스, 소외, 불평등, 계급 구조의 재생산이라는 문제를 낳았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성’과 ‘성과’가 강조되면서, 일은 점점 비인간적 경쟁의 장으로 변질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디지털 전환과 AI가 빠르게 노동의 자리를 대체하면서, 기존의 노동 구조가 해체되고 있습니다.
- 키오스크가 사람을 대신하고,
- 알고리즘이 기획자와 작가의 자리를 위협하며,
- 자율주행이 운전 직업을 대체하는 현실.
이제 더 이상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공식은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노동이 사라진 자리를, 우리는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요?
2. 일이 사라지는 사회: 위기인가, 해방의 기회인가
노동의 종말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비관적 시각, 다른 하나는 낙관적 전망입니다.
● 비관적 시선: 인간의 쓸모가 사라진다?
일이 사라진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존재의 위기를 의미합니다. 단순히 월급을 못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감각의 상실, 즉 자아 정체성의 붕괴입니다.
- 40대 이후 실직한 이들이 사회적 관계까지 잃는 이유는,
그들의 ‘존재 가치’가 오랫동안 직업에 의존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청년 실업이 장기화되는 이유도 단순한 취업 문제를 넘어서,
“나라는 인간이 필요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감정적 낙담에서 비롯됩니다.
디지털 경제에서는 소수의 ‘테크 엘리트’만이 생존 가능한 구조가 생겨나고, 대부분은 ‘불필요한 인간’으로 분류되는 사회적 소외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습니다.
● 낙관적 시선: 인간은 노동 이상이다
반면, 다른 시선도 존재합니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인간 본연의 삶으로 돌아갈 기회라는 것입니다.
기계가 일한다면, 인간은 더 이상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일에서 벗어나 창조, 예술, 관계, 성찰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실제로 베이직 인컴(기본소득), 4일 근무제, 유연 노동제 등의 실험은 **‘노동하지 않아도 생존 가능한 시스템’**을 점차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일을 수단이 아니라 삶의 선택지 중 하나로 인식하는 시대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중인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이 없어진 이후, 인간은 무엇을 통해 의미를 얻을 것인가?
이는 단순히 사회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 질문이자 개인의 자아 탐색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3. 새로운 노동의 의미: 존재로서의 삶을 회복하기
노동이 사라지지 않더라도, 그 의미는 재정의되어야 합니다.
이제 노동은 ‘임금 노동’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더 넓은 사회적 가치와 관계성을 담는 개념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 노동을 ‘가치 생산’으로 다시 보기
- 아이를 키우는 일,
- 가족을 돌보는 일,
- 공동체를 돕는 일,
- 예술 활동, 자원봉사, 공부…
이런 활동은 그동안 ‘노동이 아닌 일’로 간주되며 저평가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또한 사회적 의미와 감정 노동을 동반하는 진정한 의미의 일입니다.
즉, ‘보상이 있는 일’만을 노동이라 부르는 시대는 지나가야 합니다.
● ‘직업’보다 ‘역할’ 중심의 사회로
앞으로는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사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가 더 중요해질 것입니다.
교사, 간호사, 상담사처럼 타인을 돌보는 직업은 물론, 마을 공동체에서의 역할, 온라인 커뮤니티의 기여자, 새로운 지식을 공유하는 창작자 등이 새로운 노동 주체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개인에게도 삶의 다중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하루는 작가, 하루는 부모, 하루는 지역사회의 봉사자일 수 있는 시대. 그것이 바로 노동의 유연한 미래입니다.
● 일에서 ‘존재’로: 새로운 인간학의 시작
일이 사라지는 시대의 진짜 핵심은, 우리가 일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서도 충분하다는 감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내가 좋아하는 건 무엇인가?', '내가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은 어떤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노동의 위기 속에서도 자기 삶의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맺으며: 노동 이후의 인간, 인간 이후의 일
우리는 지금 노동의 종말이 아니라, 노동의 전환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계가 인간의 역할을 대체하는 시대, 인간은 오히려 더 인간다워져야 합니다.
단순히 더 많은 시간과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삶의 의미를 위해 일하고, 때로는 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이러한 전환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 노동이 아닌 활동에도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적 인식 전환
- 일자리 중심이 아닌 역할 중심의 정책 설계
- 인간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기본소득, 복지 시스템의 확대
- 무엇보다 각자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고 스스로 삶을 설계해 나가는 자기 성찰의 문화
앞으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세요?’라는 질문보다
‘어떤 삶을 살고 계세요?’라는 질문이 더 자연스러운 사회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노동이 사라지는 시대, 인간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닌 삶의 주체로 서야 할 때입니다.